가난이 또 한 사람을 질식시켰다. 지난 6월25일 인천 연수구 한 원룸주택의 반지하방에서 목을 맨 지 적어도 일주일이 넘은 한 중년 남자의 주검이 발견됐다. ‘숲속 홍길동’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던 1인 영상활동가 이상현(48)씨였다. 집주인은 그가 2주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35만원짜리 월세는 여러 달 밀린 상태였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같이 활동했던 동료와 선배들이 달려왔다. <노동의 소리> 김호철 대표는 소주병 몇 개와 옷가지가 어지러운 방을 치우며 직감적으로 “이상현 동지가 배고파서 죽었구나” 했다고 한다. 그렇게 추측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상현이는 늘 배가 고팠다”
“지금 수중에 전혀 현찰이 없고 남은 돈은 2700원인데 이 돈으로 PC방에 와서 인터넷을 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동지들께 전화드릴 돈이 없습니다. …당장 먹을 쌀이 없는 상황입니다. …염치불구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동지들께 이메일을 보내드립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고 이상현씨가 지난 4월9일 <노동의 소리> 게시판에 마지막으로 올린 글이다. 그날 이씨는 한 집회를 촬영한 뒤 동료들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캠코더와 노트북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밥을 얻어 먹고 작업할 공간도 마련하며 활동해오던 그다. 살 곳조차 마땅치 않은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로 보였다.
그로부터 두 달, 그는 살아보겠다는 희망과 무기력한 절망을 오간 것으로 보인다. 게시판에 글을 올린 뒤 그는 노동자교육센터에 들러 예전에 사용했다가 고장난 장비들을 가져가기도 했단다. 동료들이 “가을이 되면 돈을 모아 새로 장비를 마련해보자”고 그를 다독이기도 하고, 소식을 들은 이들이 알음알음 돈을 보냈지만, 그를 일으키기는 쉽지 않았다. 죽기 한 달 전쯤에 이씨는 지인들에게 일제히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지인들은 경찰에 행방불명 신고를 내기도 했다. 6월 초엔 김호철 대표에게 “열심히 다시 한번 일해보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죽기 바로 며칠 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 이상현씨는 1988년 한국전력에 입사해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2004년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영상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2009년 5월11일 인터넷 라디오 방송 <촛불의 소리>에서 “2000년 이랜드 파업 때 수천 명 공권력이 사업장으로 들어가서 노동자 수백 명을 연행하는 것을 보면서 대기업 노조 활동가로서 책임감을 느꼈다”며 “그 뒤로 회사 일 틈틈이 시그네틱스 파업, 이주노동자 농성장 등 작은 현장들을 찾아다니며 영상으로 연대하는 일을 하게 됐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일이 있다. “회사에선 어용노조와 권력을 상대로 싸웠다”는 그는 회사를 그만둔 뒤엔 수입 없는 생활과 자존심과 싸워야 했다. 2009년 4월 김호철 대표는 “상현이는 늘 배가 고팠다. 우리는 그를 만나면 꼭 밥을 산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고 이상현씨의 죽음은 2009년 4월 카메라를 들고 1300일 동안 기륭전자 파업 현장을 지켰던 고 김천석씨의 죽음에 이은 두 번째 영상활동가의 자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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